바닥까지 떨어진 한국해운 위상…'재도약' 선언하다 [유창근의 육필 회고]

입력 2023-05-11 10:00   수정 2023-05-25 09:22


2017년 10월11일. 중국 심천의 호텔 대회의장에는 글로벌 해운 물류 관련 인사들, 미국계·중국계를 중심으로 한 각국 화주들, 취재진을 포함한 500여명의 참석자가 모여 있었다. 이 모임은 글로벌 경제전문지인 미국 ‘JOC(Journal of Commerce)’가 주관하는 ‘Trans-Pacific Maritime(TPM)’이라는 연례행사였다. 선사와 화주, 물류 회사의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국이나 아시아에 모여 해운 물류 주요 이슈들에 대해 전문가 견해를 듣고 토론하며 선사·화주·물류회사 간 관계 증진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해 TPM 아시아 콘퍼런스에 참석한 면면을 보면 현대상선을 비롯해 머스크 라인, CMA-CGM, 코스코(COSCO), 아마존, DHL, 월마트, 코카콜라 등 많은 글로벌 물류업체가 참여했다. 당시 나는 이 행사의 기조 연사로 나서 한 시간 이상 발표했다. 2020년부터 발효되는 선박의 아황산가스 규제를 시작으로 환경 규제가 해운물류 산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란 내용과 함께,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상선은 어떤 전략으로 변화를 기회로 삼아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청사진을 제시했다.

연설의 주요 내용은 환경 규제에 대한 현대상선의 대응전략으로 포장돼 있었지만, 핵심은 ‘초대형선 건조’였다. 현대상선을 성원하는 몇몇 화주들은 초대형선 건조를 암시하자 긍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대다수 참석자들은 회의적이거나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1년 전인 2016년 8월 말 갑작스럽게 터진 한진 사태로 인해 한국해운과 현대상선의 위상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었다. 사장 취임 후 한진해운 사태 수습 중이던 같은해 10월 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박스 클럽 회의(Box Club Meeting)에 참석해 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박스 클럽은 글로벌 선사 소유주(오너)나 대표이사가 참석하는 회의로 유럽에서 1회, 그 외 지역에서 1회씩 연간 총 2회 열린다. 과거에는 선사의 관심사인 운임, 수급 상황 등을 논의했으나 현재는 주로 환경, 각국 해운 관련 규제, 해상 안전 등의 안건이 주로 논의되는 자리다.

상당 기간 박스 클럽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현대상선과 같은 얼라이언스(Alliance) 대표주자였던 APL(American President Line)이 1년 전 CMA-CGM에 합병돼 없어진 빈자리가 커 보였고, 한진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G6 얼라이언스 멤버들의 시선은 냉담했다. 박스 클럽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머스크에 매각된 함부르크수드(Hamburg Sud), 하팍로이드(Hapag-Lloyd)에 합병된 UASC, CSAV 등의 글로벌 선사가 사라지져 박스 클럽 참석자가 3년새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2017년 3월, 2M(세계 1~2위 선사인 머스크·MSC)과 얼라이언스 협력 계약을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개최된 박스 클럽에서도 여전히 현대상선과 한국 해운에 대한 인식은 개선됐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내 언론 역시 “2M과 맺은 계약이 과연 얼라이언스 계약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현대상선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보던 때였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한진해운 사태 여진(餘震)이 아직 가시지 않은 2017년 10월 현대상선 대표이사가 3년 후인 2020년 발효되는 환경 규제에 대한 화두를 들고 나와 국제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할 것이라고는 경쟁 선사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초대형선 건조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때가 현대상선에게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2020년 초대형선 투입과 관련된 모든 조건이 퍼즐처럼 맞아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경 규제가 본격화하는 이 시기에 맞춰 연비 최상의 초대형선 투입은 현대상선에게 원가 경쟁력 면에서 반전을 가져다줄 기회라 확신했다. 그러면서 나는 2M과의 협력 계약 체결 직후부터 JOC에 차기 TPM 행사 기조연설 가능성을 타진하고 준비했다. 대내외적으로 초대형선 건조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미 내부 검토와 대주주인 산업은행과의 협의가 끝난 상태였다.

이 3년 중기 계획의 핵심은 첫째, 아황산가스 규제가 시작되는 2020년을 목표로 스크러버(Scrubber·아황산가스 제거 장치)를 장착한 초대형선을 건조하는 것이었다. 둘째, 남아 있는 기간 대형선의 선박이 투입되는 유럽 항로와 미주 동안 항로에서의 시장 점유율을 점차 높여가는 것이었다. 셋째, 2020년 3월 2M과의 계약 종료시 새로운 협력 파트너와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JOC 행사 7개월 전인 2017년 3월 당시 2M 얼라이언스와 협력 계약을 체결할 때 통상 협력기간을 5년으로 하는 관례와 달리 3년으로 합의한 것은 한진 사태로 인해 상황이 매우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머스크, MSC 두 회사는 한진 사태 이후 현대상선의 대응을 지켜보는 상황이었고 현대상선으로선 선택지가 좁아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협력인 만큼 우선 3년 협력한 후 향후 거취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처럼 2M 얼라이언스와의 협력 종료 시기와 본격 환경 규제가 시작되는 2020년에 현대상선이 초대형선을 투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2020년부터 발효되는 아황산가스 규제로 인해 스크러버를 장착한 초대형선은 현대상선에 ‘일석삼조’의 가치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첫째, 2017년 당시 조선 불황으로 선가는 고점 대비 20% 이상 저렴하게 건조할 수 있어 초대형선으로 슬롯(20피트 컨테이너를 적재할 수 있는 공간)당 단가를 현저히 낮출 수 있었다. 둘째, 고유가 시대에 발맞춰 경제적인 엔진을 장착해 기존 고속선에 비해 60% 이상 연료 소모량을 줄일 수 있었다. 셋째, 선박 건조 시부터 스크러버를 설치해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 관련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데다 항로 투입시 상대적으로 저렴한 고유황유를 쓸 수 있게 돼 저유황유를 쓰는 다른 선박에 비해 유류비를 10~30%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현대상선 역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선두권에 있는 선사들보다 훨씬 경쟁력 있는 선박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스크러버 설치비용이 신조인 경우 척당 100만달러 정도여서 기존 선박에 설치하는 비용인 800만~1000만달러에 비해서도 월등히 저렴했다. 이 같은 경쟁력을 갖춘 초대형선은 2020년 2M과의 계약 갱신 협상 또는 타 얼라이언스와의 협력을 모색함에 있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 [대한민국 해운강국의 길 - 유창근 전 HMM 대표 육필 회고]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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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닥까지 떨어진 한국해운 위상…'재도약' 선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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